매일경제
[매일경제=베인앤드컴퍼니 원준 파트너·박지호 파트너] 과거 공급망 관리는 원가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주된 목표였다. 주요 유통·제조 회사들은 '재고 관리' '비용 감축' '가성비 제품 수급'이라는 삼박자만 갖춰도 비교적 높은 수익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19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발생한 공급망 붕괴는 이런 업계 상식을 뒤집었다. 더는 원가 경쟁력만으로는 생존이 어려워진 새로운 환경이 펼쳐진 것이다.
현재 전 세계 시장엔 550만개 이상의 생산시설과 17만개가 넘는 물류센터가 포진해 있다. 이들이 취급하는 제품만 350억개를 훌쩍 뛰어넘는 세상이다. 이런 맥락에서 유통·제조 기업들은 수요 대응, 공급망 대응, 채널 성장 전략 등 새로운 '삼박자'를 갖추지 못하면 도태될 환경에 처했다. 과거에도 기업들은 이런 난제에 정답을 찾으려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나 최근처럼 예측 불가능한 변수가 시장을 뒤흔드는 상황에서는 '공급망 회복력(resilience)'은 중장기 과제가 아닌 당장 실천해야 할 필수 과제가 됐다.
유럽의 대표 유제품 회사인 다농(Danone)은 얼마 전 영국과 유럽 각지에 분산돼 있던 유제품 공장을 영국 한곳으로 통합하는 개편을 실시했다. 한 예로 프랑스 공장엔 자동화 검사 공정 설비가 없어 다른 공장 대비 품질 관리 인력이 과다 투입됐는데, 이를 과감하게 한곳으로 통폐합한 게 핵심이다. 그 결과 이 회사는 가공비와 물류비를 각각 7%, 5% 감축해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스위스의 네슬레, 미국의 타이슨푸드 등 세계 주요 유통 기업이 최근 이처럼 생산 및 공급망 개편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아직 상당수 유통 기업은 20세기형 일하는 방식에 머물러 있다. 예컨대 아직도 일부 국내 유통 기업은 고객에게 물건을 배달할 때 배송 기사에게 업무를 수동 혹은 엑셀로 할당한다. 배송 기사는 도착지만 덜렁 받은 채 길거리에 나선다. 운이 안 좋은 날은 교통 정체 구간에서 우왕좌왕하다가 시간을 허비한다. 퇴근 전 배송 업무 일지를 따로 제출하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실제 배달에 집중하는 시간은 더 줄어든다. 배달 업무에서만 대여섯 가지의 병목 요인이 발생한다.
국내 일부 유통 기업은 이런 병목 요인부터 줄이며 공급망 개편에 나섰다. 한 대형 유제품 기업은 실시간 정보를 활용해 배송 기사에게 하루 동안 움직일 최적의 동선(動線)을 짜주고, 교통 상황에 따라 경로를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하며 생산성을 높였다. 이른바 '동적 라우팅' 방식이다. 운송 시간을 단축하고 생산성을 확 높이는 동시에 고객에겐 배송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려주며 유통망을 한층 진화시키고 있다.
더 나아가 많은 해외 기업은 생성형 인공지능(AI)을 적극 활용해 공급망 위기에 대응한다. 싱가포르의 초대형 식품 원자재 유통회사 올람(Olam)은 생산량, 날씨 패턴, 원재료 가격 추이, 재고 수준, 매출 수준 등 자사 데이터와 온라인상에 존재하는 모든 데이터를 긁어모아 공급망 위기를 예측하는 시스템을 운영 중이다. 시나리오별로 위기 상황을 예측해 의사 결정자들이 일목요연하게 상황을 짚을 수 있는 보고서 시스템을 구축 중이다.
최근 10년간 유통 산업은 붕괴에 가까운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소비재 부문의 총주주수익률은 120%에 불과해 테크 업계의 7분의 1 수준에 그친다. 이미 선두 기업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AI와 디지털을 통한 생산·물류 거점 네트워크 최적화로 뼈를 깎는 체질 개선에 나섰다. '최저 비용이 발생하는 지역에서 제품을 생산하고, 고객 수요에 맞춰 유통 최적화를 수행하고 있는지' 혹은 '돌발 이슈가 발생해도 안정적인 공급을 확보할 수 있는 컨틴전시 플랜은 있는지' 등 매우 큰 그림에서 포괄적인(holistic) 공급망 전략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