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
[매일경제=강지철 베인앤드컴퍼니 파트너] 전통적으로 아시아 소비재 기업이 글로벌 무대에서 강한 브랜드 파워를 갖는 사례는 드문 편이다. 아시아 소비재 회사 중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선정하는 '100대 글로벌 브랜드'에 진입한 사례는 소수의 중국 기업뿐이다. 서구권 소비자들이 문화의 벽을 넘어 아시아권 소비재에 관심을 두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높은 장벽에도 불구하고 최근 흥미로운 통계가 하나 발표됐다. 베인이 아시아 소비재 업계 상위 50개 회사의 2012~2021년 실적을 분석한 결과 지난 10년간 연평균 국내 매출 성장률은 3%에 그쳤던 것에 비해 해외 매출 성장률은 9%를 기록했다.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해외 시장이 국내 시장보다 3배 넘게 빠르게 성장해온 셈이다.
기업은 보통 두 가지 선택지를 두고 해외 진출 방향을 설정한다. 자국 상품 수출과 해외지사 설립 등을 통해 유기적으로 차근차근 해외 시장 저변을 넓히는 것이 보편적인 방법이다. 해외에서도 잘 알려진 일본 간장 브랜드인 기코망이 소비재 분야에서는 유기적으로 성장한 대표 성공 사례다.
이와 대조적으로 최근에는 인수·합병(M&A)을 통해 공격적으로 해외 시장에 진출하는 회사도 적지 않다. 베인 집계에 따르면 2012년부터 2021년 사이 아시아 소비재 기업 상위 50곳 중 19곳이 해외 확장을 시도했는데 이 가운데 68%는 M&A를 활용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 기간 중국의 하이얼은 인수·합병 3건을 진행해 해외 매출을 1247% 늘렸고 일본의 아사히는 인수·합병 8건을 통해 해외 매출을 551% 확대했다. 한국의 CJ제일제당도 인수·합병 4건으로 해외 매출을 337% 늘렸다.
해외 M&A의 가장 큰 장점은 기존 방식으로는 지지부진한 해외 진출의 숨통을 틔운다는 점이다. 일본 맥주회사인 아사히가 호주 맥주회사인 칼튼앤드유나이티드브루어리(CUB)를 인수했던 게 대표적이다. 호주 내 구매와 운송 채널을 단숨에 삼켜 비용 절감 등 여러 측면에서 '퀀텀 점프'를 이뤄낼 수 있었다.
다만 해외 M&A는 문화적 차이까지 고려해 정교하게 접근해야 한다. 아사히는 CUB를 인수하면서 아사히만의 핵심 가치와 행동 강령을 전파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그러나 이 회사의 오세아니아 지역 본부(GQ)는 일본 본사의 가치는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현지 문화와 지역에 걸맞은 운영 방침을 새로 정했다.
M&A를 한다고 해서 피인수 회사의 모든 것을 바꾸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일본 화장품 기업 시세이도는 미국 시장에 진출하려 드렁크엘리펀트(Drunk Elephant)를 인수했는데 이 회사 브랜드의 존재감은 여전히 부각시킨다. 120명 남짓한 직원들이 기존 브랜드에 강한 애착을 보이는 데다 스타트업에 대기업 문화를 주입시키면 오히려 성장을 발목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 브랜드를 유지해 고객 저변을 넓혀나가는 이른바 '반란(insurgent) 전략'이다.
결론적으로 해외 M&A는 그동안 글로벌 시장에서 열세였던 아시아 소비재 기업이 한 단계 도약하는 열쇠였다. 물론 이들 기업 모두 자국에서 탄탄한 본업을 쌓아왔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M&A 승부의 세계에 '완벽한 타이밍'이란 없다. 경기 침체기에 모두가 M&A를 외면할 때 기회를 포착한 기업만이 경기 상승기에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