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
[매일경제= 신우석 베인앤드컴퍼니 서울사무소 파트너] 지난 몇 년간 필자가 국내 주요 기업의 CEO들과 빈번하게 논의한 주제 중 하나는 '회복탄력성(resilience)'이었다. 회복탄력성은 '예상치 못한 위기를 겪게 되더라도 신속히 이전 상태를 회복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된다. 최근 회복탄력성이 경영전략의 핵심 화두로 부상하게 된 이유는 코로나19,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겪으며 경영 환경의 불확실성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신문 기사만 보더라도 '전대미문', '미증유'와 같은 표현들이 거의 매일같이 등장할 정도다.
사실 기업과 CEO의 입장에서 경영 환경의 변화란 상수(常數)와도 같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만이 불변의 진리다"라는 경영 금언이 의미하는 바이기도 하다. 이러한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나아가 변화를 어떻게 기회로 활용하는지에 따라 기업 성패가 좌우된다.
물론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한 변화들이라면 기업들도 사전에 체계적으로 준비 태세를 갖출 수 있다. 그러나 코로나19와 같이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예측하기 어려웠던 위기를 사실상 무방비 상태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그 어떤 기업도 위기 발생 초기의 '완전한 혼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기존 경영 계획 대비 막대한 차질이 발생하는 것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큰 희생을 치르고 난 후에야 기업들은 비로소 회복탄력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절실하게 깨닫기 마련이다. 특히 글로벌 공급망 붕괴로 인해 핵심 부품 수급이 어려워 생산에 막대한 차질을 빚었거나, 소비자들의 외부 활동 제약으로 인해 수요가 급감했던 기업들은 더더욱 만시지탄의 쓰라린 심정으로 회복탄력성의 의미를 되새겼다.
다만 엔데믹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약 2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 기업들이 코로나19 기간 중 값비싼 수업료를 치르며 얻었던 회복탄력성의 교훈을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지 필자는 조금 우려가 된다. 많은 기업들이 '극한의 운영 효율성'을 추구하며 갈고 다듬어 왔던 사업모델은 코로나19라는 전례 없는 위기 상황 앞에서 그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회복탄력성이 내재되지 않은 운영 효율성은 결국 사상누각일 뿐'이라는 것은 코로나19가 남긴 '뉴 노멀'의 핵심 메시지다. 우리 기업들이 특유의 단기 위기 대응 역량을 총동원하여 팬데믹 위기를 비교적 수월하게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독이 된 것일까. 적지 않은 우리 기업들은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운영 효율성 극대화' 기조로 회귀하고 있는 것 같다.
문제는 전문가들이 예측하듯 제2, 제3의 팬데믹이 언제든 재발할 수 있고, 글로벌 차원의 지정학적 불안정성 또한 지금보다 크게 나아지길 기대하긴 어렵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측하지 못한 위기가 다시 찾아오더라도 단기 대응으로 돌파할 수 있다'는 생각은 순진함을 넘어 기업의 운명을 뒤흔들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팬데믹의 교훈이 잊히기 전에, 우리 기업들이 회복탄력성 제고를 위한 근본적 고찰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